생각하고 찌끄리고
위험하고 비겁한 '양비론'에 대한 생각 본문
오늘날 우리는 각종 갈등과 문제 상황에서 ‘두 편 모두 문제가 있다’라는 식의 양비론을 자주 접하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 완벽하게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전적으로 틀린 경우는 드물 수 있다. 그러나 “양쪽 다 똑같이 잘못이 있다”라는 주장은 때로는 복잡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더 나아가 명백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절박함을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위험하고 또한 비겁하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사례와 더불어, 성경적 교훈까지 참조하여 양비론이 어떻게 문제를 야기했는지 살펴보고,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1. 명백한 책임을 흐리는 결과
(1) 제국주의와 전범 처벌의 사례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를 살펴보자.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전쟁범죄와 식민지 지배는 결코 ‘상대편도 잘못이 있다’라는 주장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부에서는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이나 식민지 정책 역시 잔혹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모든 제국주의는 똑같이 나쁘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등장하였다.
물론 제국주의가 전체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권리를 침해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피해와 범죄 행각을 한데 뭉뚱그려 “똑같이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각 경우에서 일어난 폭력과 피해의 정도, 역사적 특수성, 그리고 책임의 크기를 모호하게 만든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일본의 전시 성범죄 등은 피해자에게 너무나 구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단지 “전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거나 “모든 제국주의는 같은 죄다”라는 양비론으로 치부될 수 없는 ‘명백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였다. 양비론은 바로 이 명확한 책임 구조를 흐리면서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 배상을 어렵게 만든다.
(2) 교회사(敎會史)의 사례
교회사 역시 ‘양비론’이 잘못된 결론으로 치달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생각해보자. 당시 십자군 원정은 종교적 열정과 함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서유럽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동방(중동) 지역을 침공했을 때, 물론 이슬람 세력도 군사적으로 대응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런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단순히 “기독교와 이슬람, 둘 다 폭력을 썼으니 똑같다”라고 말해버리면, 실제로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식민지적 약탈과 대규모 학살, 그리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입은 피해가 가려진다. 십자군이라는 거대하고 조직적인 군대가 정복의 명분을 앞세워 벌인 행위는, 그 대응책으로서 일어난 폭력과 단순 “동등” 비교가 어려운 특정한 구조적 폭력이었다.
또 다른 예로,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립이 있다. 가톨릭교회 내부의 부패와 성직 매매 등을 비판하며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기존 체제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개신교 진영 일부도 지나친 폭력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거나 성상 파괴 등을 자행했다. 이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부패했고 폭력적이었으니, 둘 다 문제”라고 단순화한다면, 당시 교회 권력이 체제적으로 누적해왔던 문제(면죄부 판매, 성직자들의 이권 추구 등)가 흐려지고, 교회 내부 부조리를 개혁하려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왜곡된다. 결국 역사적 특수성과 책임의 정도, 개혁의 본질적 의미가 훼손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한 외면
(1) 전후 국제사회와 양비론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체제가 확립될 때 국제사회는 전쟁 범죄를 단죄하고, 피해를 복구하며, 전후 재발 방지를 위한 여러 기구를 설립하였다. 유엔(UN)의 설립과 각종 인권 규약의 등장은 바로 ‘전쟁 범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일종의 도덕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전후 냉전 시기에 이르러, 미국과 소련이 서로 적대하는 상황에서 “양측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니 둘 다 똑같이 잘못이다”라는 양비론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핵무기 개발 자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나라가 언제, 어떻게 그 기술을 악용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국제 협상을 해왔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둘 다 똑같이 핵무기 경쟁을 했으니 잘못”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각 행위자의 책임과 전략, 그리고 피해 양상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2) 종교적 충돌의 도덕적 관점
교회사에서도 도덕적 판단의 외면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누적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이 이슬람 지역에 남긴 상흔은 “전쟁은 원래 참혹하니, 양측 모두 폭력이 심했다”라는 일반론으로 덮을 문제가 아니다. 교황권이 지닌 당시의 막강한 영향력, 피정복 지역에서 벌어졌던 약탈과 학살의 양상,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들의 구체적 고통을 살피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3. 목소리가 필요한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효과
(1)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양비론의 또 다른 위험은 피해자를 더욱 소외시키고 침묵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시민들은 부당한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탄압과 고문, 폭력을 겪었다. 그런데 이때도 “민주화 세력도 과격했고, 정부도 다 잘한 건 아니니 둘 다 문제다”라는 식의 주장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희석시킬 수 있다.
자신들이 입은 피해와 목숨까지 위협받은 현실은 무시되고, ‘모두가 비슷하게 잘못했다’는 결론이 나면 가해 권력자는 책임을 적게 지고 넘어간다. 이러한 과정은 궁극적으로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고, 진실 규명과 사회적 치유의 과정을 방해한다.
(2) 종교개혁의 맥락에서도 일어난 피해자 침묵
종교개혁 당시에도, 부당한 면죄부 판매와 교회 권력층의 부패로 인해 종교적·영적 자유를 빼앗긴 신자들은 피해자였다. 하지만 개혁운동 과정의 일부 급진적 행위만을 부각시키며 “개혁 세력도 폭력적이었으니 둘 다 문제”라고 몰아가면, 정작 부조리와 비리를 바로잡고 신앙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다수의 목소리는 묻히게 된다. 이것이 곧 양비론의 또 다른 폐해다.
4.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양비론의 문제점
성경은 정의와 불의를 분명히 가를 것을 가르친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1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옳고 그름을 선명하게 분별하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도리어 책망받을 태도임을 경고한다. 또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는 말씀도, 불의를 방관하거나 중립을 가장하여 함께 책임을 흐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는 말씀은, 명확한 피해와 억울함이 드러난 상황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거나 양비론적으로 흐려버리는 것이 결국 죄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공의를, 오직 공의를 따르라”(신 16:20)는 구절 역시 불의와 정의가 마주쳤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분명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성경은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어 책임을 흐리는 태도를 경계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양비론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선상에 놓고, 혹은 애매한 중립을 표방함으로써 불의를 방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성경적 가치와도 배치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5. 양비론이 위험하고 비겁한 이유
- 책임소재를 흐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나누어진 상황에서도 ‘둘 다 잘못이다’라는 말은 책임자를 가려낼 기회를 박탈한다. 이는 구조적 폭력과 부정의를 용인하게 만든다.
- 도덕적 판단의 회피: 양비론은 한쪽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립적·객관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도덕적·역사적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문제를 심화시킨다.
- 피해자 침묵 유도: 양비론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정당성과 공간을 축소한다. 결국 진정한 해결과 화해보다는 갈등을 묻어두고 넘어가게 된다.
- 왜곡된 균형: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미명하에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동일 선상에 두어 상대화해버릴 위험이 크다.
6. 결론
역사는 우리에게 양비론의 위험성과 비겁함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인간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한쪽에만 전가하는 극단적 편향도 경계해야 하지만, 명백한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흐리는 양비론 역시 경계해야 한다. 성경 또한 애매한 중립이나 불의를 방치하는 태도를 분명히 책망하고,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가르친다(계 3:15-16, 엡 5:11, 약 4:17, 신 16:20 등).
진정한 중립이나 객관성이란 모든 사실을 구체적이고 면밀하게 조사·분석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둘 다 문제’라는 말만으로 넘어가는 안일함은 역사 속 부정의와 참혹함을 또다시 되풀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양비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마주하며 책임과 재발 방지에 힘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건강하게 발전하는 길이다.
성경 구절
-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5-16)
-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 5:11)
-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 “공의, 오직 공의를 따르라.” (신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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