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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혜 누리기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우   성   민
(새성실교회, 백석예술대학)


사람의 일상적인 삶과 행동은 짐승의 것과는 다르다. 짐승의 삶과 행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며 미국에서나 한국에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르고, 동 시대 같은 사회 내에서도 각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사람의 삶은 자연이나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인간관, 자연관 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생활 방식, 행동 방식에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보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가치관, 인간관, 자연관 등을 통틀어 세계관이라 부른다. 세계관은 이론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므로 철학과는 다르나 인간 행동 양식에 대한 포괄적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철학에 의해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역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종교 곧 신앙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관이나 그 배경을 이루는 종교적 신앙이 항상 의식적으로 인지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의식되지 않는 세계관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 19세기 말까지도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양식으로 먹고, 숨 쉬고, 가정을 이루는 등 비슷한 생의 과정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국제화가 이루어지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는 상이한 종류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세상 안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삶과 문화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각과 생각의 차이점들을 확인하고 나자 어떤 이들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떤 시각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 그 나름대로 옳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가장 큰 두 가지의 시각이다.
첫번째는 ‘아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입장이다. 또는 차등을 두어서 ‘아주 옳은 것과 조금 옳은 것이 있고, 또 조금 옳지 않은 것과 아주 옳지 않은 것이 있다’
두번째는 모든 것이 다 옳다는 관점이다. ‘제 나름대로 다 옳은 이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상대주의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는 단어가 관용(tolerance)이다. 관용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존 로크(John Locke)에 의해서 처음으로 부각되었다. 로크는 특별히 종교적 관용을 강조했다. 당시 서양사회에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다른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계몽사상의 대두와 더불어 신앙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더 중요하다는 전제에서 관용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세계관의 정의

세계관은 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삶에서 만나는 사물 혹은 사건을 판단하거나 관찰하여 결정을 내리는 ‘원칙들’, ‘이상들’, 혹은 ‘틀’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천안함이 서해에서 침몰했다. 정부와 군은 곧 북한의 공격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미국, 호주 그리고 중립국인 스웨덴을 포함한 조사단을 꾸며서 조사했다. 결과는 사람들이 예상한대로 북한의 어뢰공경에 의한 침몰이라고 발표되었다. 이후에 일부사회단체등에서는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들이 열리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단체들은 반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의 자작극으로 보기도 했다. 한가지 사건을 놓고 어떤이들은 정부와 군의 발표를 신뢰했고, 어떤이들은 발표를 신뢰하지 않았다. 왜 이러한 결과를 사회가 가질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판단의 잣대들을 가지고 있다. 어린시절에 교육받은 내용, 자라온 사회적 지리적인 환경, 독서를 통해서 얻은 지식들,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진 생각의 체계 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것들이 사건을 만나면 바쁘게 작용하고 그 결과물로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정부와 군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결론을 도출했어도 그 이유를 따지면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뢰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 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을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친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은 천안함의 침몰을 목격도 하지 않았고 따로 특별하게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지만 정부와 군을 불신하는 결론을 갖는다.
반대에 서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정부와 군의 발표를 신뢰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미국을 좋아하고, 625참전의 기억 때문에 북한을 미워하고 군에 대한 신뢰가 무한해서 내가 스스로는 정보를 수집하지도 않고 목격하지 않았고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도 정부와 군의 발표를 믿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가지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결론들을 도출하는 것이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자료, 판단의 자료, 지식의 자료, 교육의 자료로 인해서 만들어진 생각의 틀 더 거창하게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즉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세계관의 역할

사건과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할 때에는 우리가 의지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자료와 판단의 자료와 지식의 자료와 성장의 배경 자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마치 처음 운전을 배울 때에 운전방법을 익히고 교통법규를 배우고 연습을 통해서 운전을 하게 된다. 처음 운전석에 않았을 때에는 많은 생각을 하고 의지적으로 생각을 따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차선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차선을 잘 살펴서 다른 차다 진행하고 있는지 살피고, 방향지시등을 켜야 한다. 이것을 생각하고 어색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때로는 방향지시등을 켜는 것이 어색해서 반대 방향으로 켜고 진입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어색한 운전방법도 오랫동안 지식이 되고 익숙해지면 후에는 의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게 된다. 마치 우리의 생각의 틀처럼.
세계관은 우리의 삶의 나침반, 혹은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세계관은 그것이 의식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나침반 혹은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마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운전을 할 때 거울들로 주변을 살피고 방향지시등과 페달들을 밟아서 운전을 하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건과 현상들의 혼란 속에서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혹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게 해준다. 가볍게는 수업을 빠지더라도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볼 것인가? 수업에 집중하려는 것을 동료가 비웃을 때 계속 집중해야 하는가? 조금 더 진지한 문제를 살핀다면,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할 때에 이혼해야 하는가? 세금 징수가 불공정할 때에 세금 고지서를 위조하거나 변조해도 되는가? 범죄는 반드시 응징해야 하는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고용인을 해고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자녀를 설득해서 못하게 할 것인가?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건들과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에 우리는 세계관의 인도를 받는다.


세계관의 비일관성

사람들은 종종 신념들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상생활의 경험이다. 이는 세계관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 역할을 중지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항해하고 있는 배가 폭풍으로 인해 원래의 항로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제적인 경향, 즉 키잡이가 제 항로를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행동이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동이나 신념, 둘 중의 하나를 바꾸려 할 것이다. 행동과 신념 간에 갈등이 있는데도 이를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우리는 성실성(혹은 정신적 건강)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세계관과 신학, 철학과의 관계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사물들에 관한 포괄적인 조망을 ‘신학’이라고 부르고, 이성의 권위에 호소하는 포괄적인 조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 신학과 철학은 양자가 모두 모든 사람이 참여하기는 어려운 전문적인 탐구 분야이다. 특별한 기술, 어드 정도의 지적 능력, 상당한 정도의 교육을 요구하며, 또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분야이다. 이는 대다수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탐구의 길이 막혀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철학의 분야에서는 일반인이 전공자들에 비해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의 문제는 다르다. 삶에 대한 조망을 갖기 위해 학위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계관은 그것이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지혜나 상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비과학적이고 오히려 전(前)과학적이다. 과학적인 앎은 항상 일상적인 경험의 직관적인 앎에 의존한다. 세계관은 과학이나 이론의 인식 차원보다 더 기본적인 인식 차원에 속한다. 미학이 미에 대한 모종의 선천적 감각을 전제로 하고 법 이론이 어떤 근본적인 정의감을 전제로 하듯이, 신학과 철학은 세계에 대한 어떤 전(前)이론적인 관점을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이 신학과 철학은 비과학적이고 전 과학적인 세계관을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다듬은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세계관, 철학, 신학은 범위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지만, 세계관이 전(前)과학적인 데 비해 철학과 신학은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계시의 종교라는 것은 존재를 인정받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독교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55:8~9)”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때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춰가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이 계시된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즉,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틀 혹은 도구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세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의 핵심적인 목적은 가르침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죄와 선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않는 성경구절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


세계관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이다. 이분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훌륭하게 키워냈다. 만약에 당신의 아들을 누군가 해쳤는데 당신은 그 범인을 아들 삼을 수 있겠는가? 보통의 사람에게는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죽여도 시원치 않을 텐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세계관이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극악한 행위이지만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의 품성과 생각의 패턴과 지식 모두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 것이다.
몇몇 행동이 변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세계관이 완전히 변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술고래였던 사람이 어느 날 한순간에 술을 끊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것은 삶의 태도와 행동이 변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품성과 생각의 패턴 그리고 지식에까지 새로운 변화가 생겨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의 근거가 되는 세계관의 변화가 없는 행동과 태도의 변화는 일시적이고 가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진정한 변화라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는 삶의 습관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 다시 말해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아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